고독한 사회성

고독한 사회성이라,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최근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이 기분은 본연의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고민 중 하나이다. 고독을 추구해야 하면서도 그 속에서 사회성을 가지려고 한다. 사회성이란 결국 외로워지지 않으려 하는 나 자신의 발악이고 마음 속 깊은 곳의 비명과도 같다. 그 소리를 듣고 있고, 그 소리를 무시하자니 내 마음과 나의 정(情)이란게 생각보다 깊은 것 같다. 그래서 난 또 약속을 잡고, 술을 한잔 걸치게 된다.

 문제는 잠시 내마음속 본연의 사회성을 끌어들인 다음이다. 자제할 수 없는 회오리 속에 나는 한바탕 만남을 가지고 나면 결국 나 홀로 스스로 남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깨닫는다. 자아성찰과 나아가 나 자신을 만들지 못하면 사회성이란 결국 한낫 가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라는 존재는 사실 쉽게 말해 착한 대인관계는 수 없이 많이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먹고 살아도 사실 별 탈은 없다. 5년이란 이른 사회생활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정말 실력 하나 없어도 난 먹고 살 자신도 있고 심지어 어느정도 사회에서 성공할 자신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나의 바램은 단지 사회성으로만 이룰 수 없다. 위대한 한 개인과 함께하는 조직이 어울려서 만들어지는게 위대함이란 것이다. 미국이 위대하게 건설되었던 이유도 뛰어난 지도자와 이를 따르는 수없이 많은 개인주의적 성향을 가진 국민들이 함께해서 그렇다. 그들은 자신을 위대하게 보고, 집단을 위대하게 보았다.

 집단주의니 개인주의니, 사실 그런 사상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을 만족시키고 싶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도 저도 나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 욕심일까? 안정적 존재란 것은 말이다. 결국 안정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바라는 것들을 성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전재되는 조건이 바로 나 자신과의 씨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꾸준함” 이다.

 정말 완벽주의란 힘든 것 같다. 내가 그러한 완벽주의가 아니던가. 완벽주의는 오래 못산다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아무리 잘되도 잘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이러한 개인의 기울어진 성향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 작은 실천을 해야한다. 이렇듯 나는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마음이 쉽게 기울여지지 않는다는게 참으로 웃기다.

 “~해야겠다” 라는 말은 이제 정말 질린다. 미래를 위해 살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는 절망만 가져올 뿐이다. 그래서 난 현재, 지금, 지금 이 매순간을 위해 살아가겠다. 이 지금의 나의 시간을 내가 이룬 성취라 생각하고.. 그런 미래와 현재의 차이를 현저히 좁히는 것이 이상주의에서 벗어나 현실과의 조화스러운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