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가 필요한 시점

오랜만의 글이다. 그간 유라임 개발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얼마전 모 VC에도 지원했지만 쓴고비를 마셨다. 최근에는 스타트업을 시작한지도 2년이 지나고 했으니 다시 풀타임 포지션을 알아보고 있다. 그러는 중간에, 정말 오랜만에 문득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고, 오늘 그 답을 찾고자 오랜만에 블로그에 그간의 모습을 돌아보는 작업을 해볼까 한다.

유라임 개발

유라임 개발에 4개월을 소비했다. 그 전에도 유라임 개발을 안한 것은 아니지만, 작년의 모습 중 남아있는 것은 로고나 약간의 디자인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특히나 프론트앤드 내부는 거의 100% 뜯어고쳤다. 데이터 수집을 하던 과정도 Akka를 써서 만들었던 것을 또 다시 뜯어고치고, DB도 많이 수정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DB의 그 관계에 있어서 고려를 많이 한 덕분에 아주 많이 고치지는 않은 것 같다. 리엑트로 바꾸면서, 데이터의 흐름에 대해 고민했고 결국 답은 아무리 백엔드에서 라우팅 기능을 많이 쪼개봤자, 최소한 프론트에서는 하나의 흐름대로 데이터를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백엔드의 기능도 많이 바꿨던 것 같다. 사실 스칼라에 대해, 그렇게 많은 이해가 있지 않았지만 ES6를 배우면서, FP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였으며 때문에 2년 전에 스칼라 강의를 들었음에도 어느정도 함수형에 대한 이해가 생겨서 다시금 공부 등을 진행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내 느낌이지만, 결국 함수형 언어라는 자체가 조금 뭐랄까 ORM의 확장이랄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을 쓰다가 다시 유라임 작업을 했다. 최근 개발중인 타임라인과 공유, 라이크 기능. 타임라인이나 코멘트, 라이크 기능이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공유 기능이 헷갈렸다. 하지만 역시나 리엑트, 컴포넌트 재사용을 통해 props만 살짝 바꿔줌으로써 해결이 가능했다. modal띄우고, 공유 컴포넌트와 멘트 정도 넣으면 url연결을 통해 나중에 뿌려주면 된다. 아직 타임라인 기능을 완성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 부분도 조금 고민을 해야한다. 어쨌든간에, 공유하는 데이터는 고유의 URL을 가져야 한다. 이로써 나중에 embedded 도 지원하고, fullscreen도 지원하려고 한다. 또 이 글을 4일째 쓰는 동안 Share기능에서 미리보기 이미지를 완성했다. Selenium이라는 Headless 브라우저가 있더라. 이런걸 써서 한다니, 어떻게 보면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다. 고유 URL도 간단한 AES알고리즘과 Base64를 통해 완성했다.

유라임이 끝(?)을 보인다는 것은 사실 좋은 일이긴 하다. 뭐 말이 끝이지, 지원하고 싶은 기능은 한도끝도 없이 많기는 하다. 추가하고 싶은 데이터 소스도 많고, 원래 생각하던 100년 인생계획 플래너도 넣고 싶고, 아이폰 앱 만들어다가 Apple Healthkit도 연동하고, weekly email이랑 learning까지도 만들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들다가는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우선은 베타 오픈하고, 나름대로 개인 데이터 시각화 SNS라는 새로운 것을 만들긴 했으니깐.. 그렇게 10월 말에 베타를 런칭하기만 하면 되니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너무나도 편하다.

취업준비 결심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일단 나도 스타트업을 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또 다른 도전을 해보려고 한다. 사실 지난 2012년 회사를 떠나온 이후 거의 혼자서 5년간 개발을 했다. 학교를 다닌 이유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프로젝트가 거의 없었다. 스타트업 참여 제의를 많이 받았지만 번번히 거절했다. 글쎄, 10여년 전의 창업 경험에서 오는 겁도 있었겠지만 열정이 있는 ‘경영’ 전문가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나는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창업을 해보니 이번엔 반대의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경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부분, 예컨데 PT라던가 Revenue, 그리고 제품을 잘 포장하고, 투자를 받기 위해 ‘보편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잘 모르겠다. 지난 모 VC의 피칭에서 느꼈던 점이다.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사업’적인 부분을 설명한 반면에 나는 ‘제품’을 소개했다. 시장성, 예상수입 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오늘은 얼마전 지원한 모 VC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다. 이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차피 통과한다 한들 달라질 점은 없다. 그저 한층 더 인정을 받은 정도랄까. 사업이란게 그런 것 같다. 어떤 것에 치우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운영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솔직한 심정으로 끈기를 가지고 유라임을 풀타임이던 파트타임이던 개발이야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이를 풀타임으로 가지고 가기에는 리스크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예전 모 대회에서는 상금을 받았다. 그런데 사업이란게 상금이 아니다. 투자라는 것은 신뢰와 함께 주는 행동 아니던가.

그런데 내가 결심한 것은, 만약 VC결과가 좋지 않게 나온다면 잠시 유라임 개발을 거의 중단할 생각이고, 결과적으로 좋지 않게 나왔기 때문에 스타트업 업무는 secondary로 미루기로 했다. 마치 주말에 서브로 하는 그것처럼. 그리고 취업준비를 할 것이다. 취준의 이유는, 우선 그간 2년간 배운 것들을 정리할 시점인 것 같고 한동안 학생이었던 내 신분을 다시 사회속으로 집어넣기 위해서, 미국 생활의 안정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큰 회사에서의 경험을 쌓고 싶은 것이 가장 크다.

그런 한번의 정리를 위해, 물론 서론이 길었지만 나 스스로 답을 내기 위해 머릿속에 쓰여진 나 스스로에 대해 ‘개발’로써, 혹은 배움으로써 나의 철학을 쌓아온 길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유년시절: 1996-2005

어려서 내가 배운 가장 처음 언어는 자바스크립트였지만, 보다 더 고차원(?)의 언어는 퀵베이직과 GW Basic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C를 접했고, 중3때부터 정보올림피아드(이하 정올) 에 나가기 위해 알고리즘과 자료구조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실, 공부를 싫어하는 내게는 수학적 지식을 무척이나 요구하는 알고리즘과, CS를 요구하는 자료구조는 배우기 힘들었다. 공부를 3년이나 했었지반 대회는 별다른 성취 없이 흐지부진하게 끝났다.

하지만 나는 사실 시각적인 부분에 관심이 더 컸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HTML과 자바스크립트, 포토샵을 배웠고 중학교때에는 일러스트레이터와 PHP 를 배웠다. 덕분에 몇몇 홈페이지 경진대회에서 입상했고, 고등학교도 운좋게 진학할 수 있었다.

고2때까지도 나는 정올을 한답시고 학교 전산실에 쳐박혀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알고리즘이나 자료구조 공부보다는 해보지도 않던 나는 왠걸 친구들이 진행하던 게임개발이 그렇게 재밌어 보이더라. 그래서 홧김에 Win32 API를 사용하는 C++의 개발로 전향했다. 여기서 특히 OOP의 이해가 재미있었고, 실제로 눈에 보이는 작업물이 나오는 것이 그렇게 즐거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욕심은 많았는데, 생각 외로 디자이너와의 불화 때문에 작품은 잘 나오지 않았다.

사실 정올을 3년간 잡고 있던 것도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는데, 제대로된 결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고2 말에 처음으로 1년간 프로그래밍을 접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프로그래밍을 안한 것은 아니고, 학교 교과목으로 공부를 했었다. 자바를 아마 처음으로 이때 공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부끄럽지만 태어나서 처음 시도해 봤던 것 같다. 수능 이후,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내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실무 이전: 2006-2008

대학에 오고 나서는 솔직히 많이 놀았다. 1년 정도는 지인의 회사 ERP의 유지보수 및 신규기능 추가 등을 담당했다. JSP에 Model 1구조로 만들어진 서비스였다. 처음 담당해보는 실무 업무라서 다소 어렵기도 했는데 생각 외로 재밌게 개발하고 했다. 덕분에 자바와 JSP에 대해서, 그리고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공부했다.

그러다가 고교때 게임개발을 하던 친구들과 의기투합해서 회사를 창업했고, 2년간 학교를 휴학했다. 처음 1년 정도는 나도 프로그래밍에 참여하며, 고교때 OOP의 이해를 도와준 친구를 통해 Direct 3D를 배우고 3D프로그래밍을 통해 개발을 계속 했었는데, 어떤 겉멋에 든 것인지 개발자를 구인하고 직원을 구인했다. 그리고 모든 개발 등을 위임하고 나는 이상하게 Project Management라는 것에 꽃혀(?) 시덥지도 않은 협업과 관련된 공부나 하고 마케팅이나 수익 관련된 기획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다 프로젝트가 제대로 나오지 않고, 계속해서 직원들이 바뀌고, 제대로된 프로젝트 하나 나오지 못하고 접을 수 밖에 없었다.

팀이 좋지 않은 상황으로 돌아가자, 나는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팀을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었지만, 나보다는 경영진의 선택에 맡겼었다. 당시에는 동기나 후배들의 숙제를 도와주곤 했는데, 주로 자바 프로그래밍 수업이 생각보다 재밌었고 간단한 Swing과 DB와 소켓 서버로 다이어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아마 자바로 만든 내 첫 풀스택 네트워크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자바를 좋아라는 했었지만, 나의 프로그래밍에 대한 관심사는 Open API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막 웹 2.0 열풍이 일어나던 시기였고, 나도 저런 멋진 서비스를 가져다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만 예전부터 워낙 Visual Studio에 익숙했던 나머지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WPF와 Silverlight를 사용하여 이직을 위해 포트폴리오를 준비했고, 거기서 처음으로 XML과 MVC에 대한 조금의 이해를 하게 되었다.

첫 회사에서 배운점: 2009-2010

신입으로 시작한 첫 회사에서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사실 초,중학교때는 DHTML, 자바스크립트, PHP를 배우고 홈페이지 꾸미는 것을 좋아했고 실제로 몇몇 대회에서도 입상했었다. 중2때부터는 C/C++을 배우고 고교때 게임개발 경시대회에 나가면서 OOP에 대해 이해하고, 자바를 공부했었다. 그리고 스무살에 JSP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하면서 최소한 자바빈까지는 이해했었던 것 같다.

창업을 제외하고 스물셋 나이에 처음으로 개발자로써 일을 시작했다. 회사는 아웃소싱 전문 회사였고, 나는 퍼블리싱 된 사이트의 유지보수를 주로 담당했다. 확실히 회사에서의 경험은 사뭇 달랐다. 물론 큰 회사는 아니고, ‘정치’라는게 있었지만 그런거야 눈치껏 잘 이겨내곤 했는데 문제는 일에 있어서 이다. 이론적으로 배운 것이나 학교 프로젝트와 실무와는 확실히 달랐다. 어떤 경우는 잘못 반영된 데이터가 갑자기 모 이사님 눈에 들어가서 사장부터 팀장까지 모두 나를 혼내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실서버 반영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어떤 스택이 주된 것인지 잘 몰랐다. 나는 C#도 알긴 알고 자바도 알긴 알았으니, ASP.NET이나 JSP 로 이뤄진 프로젝트는 뭐든지 진행했다.

(당시 쓴 글들)

http://matthew.kr/신입에게-기획을-이것은-기회다/
http://matthew.kr/asp-프로그램의-설계/
http://matthew.kr/자바-유지보수-시작되다/

그러다가 한 4개월쯤 되어서 처음으로 Spring 2.5로 이뤄진 사이트의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고, 자바와 스프링이라는 신세계를 맛보게 되었다. MVC에 대한 이해도 이때쯤 시작되었다. iBatis, Velocity에 대해 접하고 WAS에 대해서도 톰캣 이외의 것을 알게 되었다. 개발 참여 2개월, 유지보수 1년을 진행하면서 더 많은 것에 대해 알아갔다.

이쯤에 나는 자바와 C# (.Net)의 고민에서 자바를 선택했고, 이는 지금의 내 커리어에서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 같다. 이후 회사에서 계속해서 유지보수를 하게 되었는데 평균적으로 한달에 하나의 사이트를 유지보수 하다보니 1년이 지나자 10개 이상의 사이트를 유지보수하게 되었다. 나는 주로 ASP와 위에서 참여했던 스프링에 참여했다. 그런데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니 사실 재미가 없었다. 매번 요청이 오면 뭐 팝업을 띄워달라던지, 마이너한 버그를 고치는 정도였으니.

그래서 남는 시간에 RIA (Rich Internet Application) 에 대한 공부를 했다. 입사 전 배웠던게 Silverlight였지만 내 생각에는 실버라이트가 그렇게 큰 호응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자바를 배워왔으니 JavaFX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Flex를 공부했다. 본래 플래시에는 Action Script라는게 있었지만, 나는 플래시가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Flex는 주로 차트 라이브러리를 다루는데 사용했고, 외부 데이터를 바인딩 하는 부분을 손댔다. 의외로 Java와 비슷한 플랙스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다.

덕분에 Flex와 PHP를 사용해서 일전에 참여한 대회에 다시금 참여해 봤지만 결과는 탈락, 그래도 Open API와 Flex 그리고 Flex의 그 ‘스킨’에 대해 배웠던 좋은 경험이 아니었나 싶다. 회사에서는 여러 언어를 다루는 것은 좋았지만, 더 큰 규모의 자바에 집중된 개발을 하고싶었고, 그래서 고민 끝에 이직을 선택하게 되었다.

두번째 회사: 2010-2012

두번째 회사는 꽤나 큰 중견 금융업체였다. 최초 나는 우리 시스템을 여러 기관에 이식하는, Gateway라는 것을 만드는 역할을 했다. 정의된 명세대로 이기종의 여러 시스템에 있는 데이터를 받아다가 XML로 정의된 endpoint로 보내주면 된다. 혹은, 이미 만들어진 JS솔루션을 그대로 몇몇 금융 기관의 온라인 뱅킹에 심는 역할을 했다. 솔루션은 자금관리 솔루션으로, 본인의 지출내역을 분석해서 일종의 자동 categorized된 내역을 보여주고 이를 차트 등으로 분석해 주는 것이다. 주로 Flex 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전 회사에서도 Flex를 다뤄왔던 나머지 생각 외로 데이터 시각화에 대해서는 이쯤에 많은 관심이 생겼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1년쯤 지나서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또 다시 개인개발을 진행했다. 지난번의 Flex개발의 설움을 딛고 이번에는 Flash Professional이란게 Adobe제품군으로 따로 독립되서 들어왔고, 특히나 Flash Catalyst라는게 정말 매력적이었다. PSD를 만들면 Flash Catalyst가 UI와 함수를 바인딩 해주고 애니메이션 효과를 프로그래밍적으로 하는 효과를 냈다. 서버는 JSP, MySQL을 이용한 간단한 서버를 만들었고, 톰켓과 BlazeDS를 이용해 Flash UI와 합쳤다. 지난번 자바 소켓프로그램 이후 두번째 풀스택 개발이었다. 특히나 내가 원하던 이쁘장한 디자인이 나오게 되서 더 기뻤고, 결과가 금상으로 나와서 기뻤던 것 같다. RIA개발의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새롭게 떠오르는 HTML5에 대해 공부를 했다. 영어 공부도 할겸 이 블로그에 번역글을 올렸고, 이를 모아서 html5한국 사용자모임이라는 것도 만들었다.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이는 내가 특히 ‘영어’에 관심을 갖게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당시까지 나의 영어 성적은 정말로 저조했다. 토익이 신발 자릿수 정도였으니, 말 다했겠다. 분명 회사를 처음 다닐때 새벽반 등을 다녔었지만 직장을 다니며 공부를 하기란 여간 쉬운게 아니었다. 다만 굿모닝팝스와 아리랑 라디오는 꾸준히 들었었다.

회사에서는 계속해서 대규모 데이터를 다뤄왔다. 제약회사/약사/약국간의 거래와 대학교의 등록금 수납 사이트를 운영했는데, 주로 결재 관련 백엔드 솔루션을 보여주는 프론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기존의 금융회사처럼, 모든 실제 카드 등에 대한 트랜젝션은 Oracle 의 트랜젝션에서 동작했지만 사용자가 입력하는 금융 정보, 예컨대 통장이나 카드번호 같은 것들은 내가 처리하여 담당하게 되었다. 간혹 에러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직접 DB에서 rollback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대규모 처리를 하면서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에러나 속도저하 현상은 자연스래 발생했다. 한번은 속도 저하 현상이 심화되어 DB운영팀과 밤을 새서 원인을 찾은 적도 있었다. 자격증을 몇 개나 가지고 계신 DBA까지도 오셔서 이를 봐주시곤 했다. L4스위치를 통한 이중화는 기본으로 되어있는데, DB이중화가 안되서 발생했다는데.. 여튼 이런 대용량 처리에 대해 의외로 많이 배워왔었다. 서버 이중화는 당시에는 거의 정석처럼 처리가 되었었는데, 항상 host바꾸고 각각 서버 반영 체크하고.. 그런 작업을 진행해왔다. 덕분에 자연스래 빌드와 배포에 대해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협업에 대한 관심

당시에는 사람들이 편안한 회사에 안주하고 기존의 컴포넌트를 업그레이드 할 생각을 안했다. 글쎄, UI/UX 컴포넌트까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기능적인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 예컨데 JSP의 핵심을 담당하던 사내 모듈이 J2SE(!) 1.3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원천소스도 없을 뿐더러, class파일만 계속 공유해다가 다른 모듈을 copy&paste해서 만들었다. 뭐 물론 기존의 라이브러리 재활용 측면에서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당시 VCS도 없고, 원천 소스 자체가 흩어져 있었으니 개인적으로 이런 부분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직접 사내 서버를 만들었다. Redmine과 Jenkins, Subversion으로 간단하게 CI/CD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소스코드를 찾아 disassemble하여 저장해 뒀다. 이렇게 하니 훨씬 깔끔한 시스템이 나왔다. 팀간에 소스를 찾아 해메지 않아도 되고, 본인의 PC에 내려밭고 작업하거나 FTP에 원격으로 작업하는 것보다는 충돌의 위험도 없고, 커밋시 자동으로 테스트 진행하고 빌드해서 팀장님께 이메일로 보고되고, OK시에 실서버에 rolling-update 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몇 개월간 이런 시스템을 고민한 끝에 팀에 적용했고, 개인적으로 결과는 아주 만족이었다.

(당시 쓴 글: http://matthew.kr/jsp유지보수-자동화-시스템-구축/ )

아마 그때부터 협업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회사를 나오고 나서도 개인적인 개발을 할 때에도 무조건 저장소와 CI환경을 만들고 시작한다. 요즘에야 Gitlab등에서 쉽게 CI/CD를 지원하고 도커 패킹만 하면 내부 환경도 건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황이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부터 나는 그런 시스템을 개인적인 스택에 두고 살아왔던 것 같다.

 

학생 복귀와 프리랜서: 2012-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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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에 휴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었다. 내가 공부하던 건물은 다른 건물로 바뀌어 있었고, 동기들은 온데간데 없고 모두가 나보다 최소 5살 어린 친구들 혹은 막 군대를 갔다 전역한 후배들 이었다. 그때부터 워낙 어린 친구들과 지내다 보니 나는 솔직히 즐거웠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실무를 3년간 하고 왔더니 아직 실무를 접하지 못한 학생들과의 격차가 생각보다 많이 벌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학교로 복학했을 때 내 마음은 그랬다. 그간 CS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즉 이론적인 것을 다시금 배우면서 실무에서 그랬던 것들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실무적인 프로젝트, 즉 본인의 포트폴리오를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그럴 때마다 프로젝트를 학생의 그것을 벗어난 범위에서 설계하곤 했다. 예컨데 첫 학기 자료구조 프로젝트에서 오픈소스를 한가지 이상 조합해서 자료구조간의 비교를 해라 라는 개별 프로젝트를 나는 NASA Worldwind라는 일종의 구글 어스와 비슷한 오픈소스를 가지고 여기에 Twitter Search API를 조합해서 위치에 따라 검색결과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각 검색결과를 서로 다른 자료구조 (ArrayList, HashMap, LinkedList등)에 따라 다르게 하여 이를 작업물이라 내놓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오픈소스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저 자바같은 것들도 오픈소스라 생각하여 그런 것들을 내어놓았다.

관련글: http://matthew.kr/컴퓨터-공학부에서-배우는-것에-대한-고찰/

조모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혼자서 몇일 집중해서 하면 될 것을 조모임이 끼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늦고, 누군가 참여안하고 그런건 난 솔직히 상관도 안한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쎄, 다른 학과의 조모임 같은것들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컴공의 경우 일단 프로젝트 자체가 향후 포트폴리오로 쓰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에게도 같이하는 후배들이 설명을 요구했고, 매번 설명을 해줬지만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계속해서 쉬운 코드, 쉬운 라이브러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더 좋은 퀄리티로 나올 수 있었던 작품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별로인 것들이 많다. 물론 내가 프로그래밍을 잘 다루는 친구들과 친했다면,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으면 아마 괜찮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학과생활에 적응한답시고 가장 재밌는 친구들과 조를 함께했다.) 글쎄, 그러면 또 다른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또 한가지의 문제점은 결국 나 자신의 문제점이지만, 시간만 비었다 하면 프리랜서 일을 했고, 뭐 한 과목을 제대로 파본 적이 극히 드물다. 공부 방법을 모르는건지 회사에서 항상 긴장 상태에서 살아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단 한 과목이라도 교과서를 독파하는 정도로 공부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어떻게 단 한과목도 안그랬지. 아마도 항상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의 시간에 특히나 스스로 관심있는것만 좋아하는 내 성격이 문제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영어공부와 미국여행: 2012

그나마 복학했던 3년간 가장 남는게 있다면 영어공부와 유럽, 미국여행일 것이다. 복학 하자마자 미서부로의 1개월간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어학원을 한달정도 다녔고, 그게 내 영어공부의 아마 첫 출발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복학을 앞두고 몇 개월은 토익 단어를 외우며, 시험을 보며 보냈지만 첫 방학기간 한달간 학원에서 약 여섯시간 정도 스터디를 하며, 영어를 잘하는(?) 어린 동생들과 보낸 시간은 사실상 충격적이었다. 내 실력이 정말 이것밖에 안되구나, r과 l구분은 커녕, 아무 지식도 없었다. 예전 끌로이가 교환학생 전 플랜티 어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던 것을 생각하며, 물론 한달밖에 안됬지만 기초반 플랜티 어학원을 다니며, 난 특히 발음이 특출나게 좋았던 동생들에게 많이 자극을 받으며 내 정말 기초에 불과했던 영어를 지속적으로 교정받았다.

어찌됬건 그해 여름 나는 미국에 갔고,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로스엔젤레스 를 여행했다. 자유여행 2주, 트랙아메리카 2주. 특히 시애틀에서의 그 낭만과, 베가스에서 맛본 자유는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은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다. 트랙 아메리카 Western-USA 를 2주간 보내면서 만난 유럽의 친구들과의 경험도, 한국 형님과 동생과의 만남도 소중했다. 정말로, 미국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 스스로가 느꼈던 그 ‘자유’에 부합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꼭 이곳에 살고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무거운 짐을 이끌고 CalTrain을 타고 지금 살고있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산타클라라의 호텔까지 왔던 것. 내가 그토록이나 선망하던 대상인 실리콘벨리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국제면허증을 안가져와서 번번히 차를 빌리는데 실패했는데, 이곳 실리콘벨리에서는 나를 삼성 직원으로 본 렌터카 업체가 흔쾌히 차를 빌려줬다. (Thanks 삼성)

정말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STOP사인 정도만 알고 차를 빌려서 가장 처음 방문한 곳이 스타브잡스의 애플이 탄생한 차고지. 이어 구글, 애플, 오라클, 어도비, 페이스북 등에 다녀오고 다시 스티브잡스의 무덤을 어떻게 찾아서 가서 조문을 하고 왔다. 워낙 오랜시간동안 맥북 아이폰을 비롯한 애플 제품을 사용해 왔고, 내 삶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잡스를 정말로 존경한 마음에서였다. 이후 스탠퍼드 대학을 보며, 정말로 화창한 날씨에 카페에서 백발의 할아버지들이 개발언어로 대화하는것을 보며, 꼭 이곳에 유학이던 취직이던 오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었고, 한국 들어가면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아주 열심히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꾸준히’는 할 자신이 있었다. 특히 일전부터 새벽기상을 좋아해서 4시에는 꼭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삼육어학원을 신청해서 주중 매일 6시에 출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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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결석일 3일 정도로 정말 열심히 학원에 다녔었다. 막판에는 토플 준비 때문에 결국 졸업을 못한 것이 사뭇 아쉬웠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정말 답이 없었던 내 영어도 역시 꾸준히 하니 차츰 늘기 시작하긴 했었다.

유럽여행과 책 집필: 2013

2013년이 시작되자 나는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든 유학을 가고 싶어서였다. 유학에는 당연히 토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중급반에 새벽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6:40 까지 강남역의 학원에 가야했고, 4시쯤 일어나서 운동하고 못다한 숙제 후 학원에 매일같이 30분 일찍 도착했다. 이유는 가장 앞자리, 선생님 바로 앞에 자리에 앉기 위해서였다. 내가 워낙에 영어가 부족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도 가장 앞자리에서 정신만이라도 독하게 차리고 이해하기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사실 이게 내가 뭔가 수험생 입장에서 현장 강의를 받는 첫 경험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달간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스터디 친구들을 만났다. 총 여섯명의 동생들. 나는 나름대로 스터디 팀장을 도맡아가며 친구들을 이끌었다. 확실히, 어린시절부터 영어를 공부한 친구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영어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모두가 유학을 준비했고, 나는 당시에는 교환학생 정도를 생각하며 정말 두달동안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목표 점수인 80점을 받았다.

학원이 끝나고 나는 일본여행에 친한 친구와 잠시 다녀왔었다. 1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동안 생각 외로 무료했었고, 나는 술만 먹으면 친구와 트러블이 있곤 했다. 그래도 아직도 츠카치 시장의 회와, 오사카의 숨겨진 로컬 맛집과 술집, 그리고 교토의 료칸에서 야경을 바라보며 했던 개인 자쿠지는 잊을 수 없다. 재밌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모 페스티발의 자원봉사자 격으로 지원을 했고, 웹사이트 제작에 합류했다. 솔직히 말해 흐지부지 해져서 결국 사이트 오픈을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EDM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뭐랄까, 지난 6년의 시간동안  내가 몰랐던 세계라고 해야할까. 그 시간동안 꾸준히 발전해온 EDM과 페스티발의 향연에서 나는 당시에도 젋었지만 더 큰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해 여름, 작년과 비슷하게 나는 유럽에 5주간 머물렀다. 3주간 TopDeck이란 패키지 프로그램을 갔다. 버스를 타고 유럽의 이런저런곳을 머무는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인은 단 세명밖에 없었고, 약 40여명의 친구들이 캐나다와 호주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버스를 타고, 나름대로 편한 호스텔에 묶으면서 파리, 융프라우, 니스, 베니스, 로마, 피사, 부다페스트, 프라하, 브라타슬라바, 크라코우, 비엔나, 드레스덴, 베를린, 부뤼셀, 암스테르담에 다녀왔다. 그리고 개인 여행으로 바르셀로나와 이비자 섬에 다녀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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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빠짐없이 값진 경험들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파리와 니스, 바르셀로나 그리고 이비자에서의 기억이 가장 컸다. 정말 단신으로 갔었던 이비자 섬에서 처음 만난 외국 친구들과 보낸 광란의 밤, 바르셀로나에서의 가우디에 대한 감탄과 한인민박 누님과의 대화, 니스에서 맛봤던 남프랑스의 향연과 코발트 빛깔의 지중해, 파리에서의 그 낭만들. 많은 기억속에 나는 I Love Cloie라는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꼭 다시금 끌로이랑 이곳에 오고 싶은 기억에서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상하게 나는 프로그래밍을 하기가 싫었다. 예술을 하고 싶었다. 이상하리만큼 지중해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도 컸다. 내가 그리던 이상속의 삶이랄까, 그런 삶을 살고싶었다. 뜨거운 햇살과 여유가 있는 동네에서 말이다. 다시 어학원에 갔었지만 선생과의 불화로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프로그래머의 길을 져버린 자체가 무척이나 헛된 생각이구나 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아마 유럽의 그 낭만에 취한것이 그토록이나 오래 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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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부터 꿈꿔왔던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리저리 포트폴리오 준비를 ‘시작’ 했다. 하지만 2012년에 의뢰받았던 책 집필건에 대해 마무리 단계가 오자 이에 대한 마무리로 분주했다. 그리고 연말에 마침내 내가 쓴 책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팔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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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유학준비: 2014

책 집필을 막 끝내고 나서, 나는 또 다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번엔 강남 파고다 어학원. 미 대학원에 가기 위해 GRE라는 시험을 치뤄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다니기 시작했다. 역시나 내가 선택한 반은 새벽반. 그래봤자 7시쯤 시작하는 수업이라 크게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GRE라는 시험이 내 수준 이상이라는 것이었다. 리딩 등의 그것은 물론, Writing도 무척이나 어려웠다. 특히 단어들. 이전에 내가 외우던 단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진지하게 생각하며 고려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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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방학 내내 GRE와 씨름하며 보냈다. 첫 시험은 v145 q161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는데, 아마 이 이후로도 무리를 해서라도 학원에 다녔어야 했다. 1월에는 스터디를 해서 열심히 했지만 2월에는 회사 일을 한답시고 스터디를 안해서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렇게 GRE는 계속해서 고전을 면치 않고 있었다. 1년에 5번밖에 못본다는 사실도 압박이었다. 공부를 별로 안하고 괜시리 소위 ‘족보반’에 다니며 기출문제만 계속해서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학교 프로젝트에 치이고 중간 기말고사 등과 함께한 두 차례의 시험은 연신 실패를 거듭했었다. 결론적으로 5번의 시험 모두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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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문제야 나 스스로의 문제가 컸겠지만, 무엇보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한게 컸고 너무 나 스스로를 자만했던 것도 문제였다. 2개월간 집중했던 결과가 6개월간 대충했던 결과에 훨씬 못미쳤으니, 말 다했겠다. 최소한 2개월의 시간은 다른것 안하고 꽤나 집중했었는데, 나머지 6개월의 시간에 학교일은 그렇다 쳐도 남은 시간에 개발을 주로했지 공부를 주로하지 못했다. 주말 활용또한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연말쯤 되서 나는 방향을 틀어서 phd지원에 나섰다.

연구방향 성립과 쓴 고비들: 2014-2015

phd로 방향을 정하고 나서 연구방향을 정하는 리서치는 꾸준히 했다. 생각 외로 실험적인 많은 툴들이 대학원 연구소에서, 혹은 교수나 석/박사 과정생의 작품이란 점이 신기했다. 이를 통해 나는 HCI, Cognitive Science, Software Engineering, Software-defined Network, Architecture 등에 대한 관심분야를 정할 수 있었다. 특히 지금 진행하고 있는 유라임 서비스는 이때에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조금은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 유라임이야 말로 내가 하고싶은 모든 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집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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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그리고 쓴 고비들: 2015

그렇게 연말까지 대학원 지원을 계속했다. 더불어 그나마 내가 시험볼 수 있었던 토플이라도 계속 보기 위해서 두 달 정도 다시 새벽반으로 학교와 번갈아 학원을 다녔다. 그런데 성적은 지난 시험보다도 더 나오지 않았다. 의아했다. 하지만 결국, 하나에 집중해서 감을 끌어올리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랩서칭을 하면서 phd과정에 내 기존 경력과 프로젝트 만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도와주시던 모 선생님과 함께 연구자료를 만들고 어플라이 했다. 몇몇 대학에서 연락이 왔지만, 결국 내 저조한 성적때문에 변변히 거절당했다.

그런 쓴 고비를 연신 맞이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디 하나 붙은 곳이 없어서 텅빈 마음으로 졸업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9년만에 학부를 마쳤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9년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참으로도 많이 달랐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단 하나, 프로그래밍, 특히 웹 개발에 있어서 나의 열의는 바뀌지 않았다. 기억나는 학과 과목은 Software Engineering과 인공지능, 확률과 통계, Programming Language 정도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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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학원 지원은 계속되었고, 결국 목표를 더 낮춰서 운명의 장난인지 처음 미국에 왔을때부터 그토록 오고싶었던 실리콘벨리부근의 대학원에 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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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프로방스, 유학: 2015

대학원 합격과 유학이 결정되고 나는 그전부터 준비중이던 결혼식을 5월에 올렸다. 사실 2015년의 초반은 기다림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수 많은 리젝을 밭았다. 아마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리젝에 있어서는 정말 정신적으로는 많이 성숙했다. 일전에는 한번 rejection을 당하면 일주일이 넘게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I’m sorry to say’나 ‘Unfortunately’ 라는 말을 들으면 그냥 무덤덤하게 넘어가긴 한다. 결국 모든게 내 노력부족이라는 사실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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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외로 성취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100이라 하면 못해도 300은 해야지만 성취라는 것을 얻을 수 있었는데, 복학을 하고 나서 그렇게 이룬 것이 아주 많지는 않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끝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열심히 안한 것과 더불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감이 한몫을 더 했다. 결국 어떤 상황이 오던간에 기존에 하던대로 노력하는 것만이 정답일 뿐인데, 계속해서 마음은 불안감만 생기고 덕분에 나도 계속해서 방황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쓸때없이 만들어낸 불안감은 지금까지도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어쨌든 결혼을 하고 나서 또 다시 한달동안 신혼여행을 빙자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주로 남프랑스를 돌아다니며 라벤더와 로제와인, 그리고 지중해를 실컷 맛보고 왔다. 물론 짧은 기간인지라 온전히 느끼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왜 이곳이 예술가를 끌어들이고 그만의 아름다운 삶이 자리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아직도 나는, 그 드넓은 라벤더밭이 주는 라벤더 향과 프랑스 시골마을의 정갈한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미국에 갔다. 정착을 하는데에는 그리 오래걸리지는 않았다. 학교도 개강을 했다. 처음에는 솔직히 수업 자체가 어려운것은 아니라서 금방 쉽게 하겠지 했는데 첫 학기에 조모임 두 개가 있었는데 두개 다 힘들게 진행했다. 수 많은 인도 친구들과의 문화적 격차는 확실히 있었고, 지난 한국에서의 팀원들을 다루듯이 하면 내가 손해보는게 너무나도 많았다. 그중 가장 손해였던 것은 이 친구들과 시간대를 맞추는 것. 보통 기숙사에 거주하는 애들 덕분에 밤 늦게나 주말에 학교 근처를 가야하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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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미국 생활에는 적응하기 시작하고는 많이도 놀았다. 일단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체가 마치 여행이라도 온 느낌이었다. 주말마다 근교의 어디에 가기 바뻤다. 공부는 뒷전이었다. ‘쉽다’ 라는 생각이 공부를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네트워크에서 배운 SDN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도 새롭게 배우는 개념은 없었다. 외국 친구들과 팀플을 통해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배웠을 뿐이었다.

프론트엔드, 아키텍처와 MSA에 대한 관심: 2015-2016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신혼 생활까지 겹쳐서 아마 더 그럴수도 있었을 것이다. 연말부터는 요리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망원경을 사서 별자리도 관찰하고, 그간 내가 사고싶던 것을 (주로 전자기기)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개발은 꾸준히 진행했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ERP시스템의 유지보수를 담당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일은 꾸준히 있었다. Spring Boots와 본래 jQuery를 사용했었는데, 후반기쯤 처음으로 AngularJS를 알게 되었고 나는 이에 빠져버렸다. 연말까지 계속해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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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조대협님의 ‘대용량 아키텍처와 성능 튜닝’ 이라는 책을 보며 아키텍처에 빠져들었다. 특히 마이크로서비스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대용량’ 이라는 자체가 사실 예전부터 내가 대규모 서비스를 접할 때 겪던 문제들 아니었던가. 이를 조금은 일반화 시켜서 만든 소중한 책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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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의 시작과 삼수강: 2016

그러다 나는 다시금 일전에 있던 아이디어를 통해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본래 phd지원을 위해 예전부터 생각해둔 자기관리 SNS서비스를 구체화 했었는데, 이를 실제로 개발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전에 다니던 한국의 회사로부터 약간의 투자를 받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회사로부터 미국에 작은 사무실을 얻고 이름을 빌려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회사에서는 내가 진행하기 원해서, 그 만큼의 고생을 몇개월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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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막상 유라임의 개발을 시작하려 하니 학교 교과목이 걸림돌이 되었다. 어렵지 않다 생각한 한 과목이 갑자기 낙제가 되면서 예상치 못하게 졸업 학기가 밀려버렸다. 무덤덤하게 생각하고 재수강을 했지만, 이상하게 또 다시 한국을 오가던 스트레스 속에 학과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했다. 특히 처음으로 접하던 미국인 강사들의 수업이 여간 힘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낙제한 과목이 또 다시 낙제하게 된다. 학부때 재수강은 해봤어도, 대학원까지 와서 삼수강을 할 줄은 진심으로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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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발은 진행했었다. 동시에 포틀랜드와 LA등 여행도 자주 다녀왔다. 여행 자체에는 전혀 후회도 없고, 개발은 나름대로 진척이 있었다. 연말까지 또 다시 학교 생활을 하며, 그리고 솔직히 대학원 3학기는 엄청나게 바뻤다. 낙제 과목을 따라잡느라 바뻤다. 내가 왠만하면 한달에 한번은 이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에도 2016년 5월,8월,9월은 아에 글이 없고 하반기에 총 글 수가 2개밖에 없는 것이 이를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나름대로 유라임 개발을 일단락했다.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IR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말 모 VC의 피칭에도 초대받았다. 학교를 열심히 다니면서, Software-defined Storage과목을 들으며 또 다시 네트워크 가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SDN과 마이크로 아키텍처, 프론트앤드 기술 등이 이후부터의 나의 주된 관심사가 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학교에서 이력서 교정과 영작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삼수강 하던 과목을 패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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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착을 위한 노력, 딸기의 하늘나라행: Early 2017

3월, 오랜만에 한국에 다녀왔었다. 그 전에도 갈 수 있었지만 사정이 생겨서 다녀오지 못했다. 그 사정이라는 것 때문에 너무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살았다. 마치 2년전의 그때처럼, 대학원에 붙지 못해 술에 취해 살았던 때처럼 지내왔다. 몸무게는 역대 최고 몸무게를 달성했고, 와이프와도 자주 트러블이 있었다. 개발도 거의 하지 못했다. 당최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에 방문했을때 의도치 않게 한달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중간고사도 있었는데 이를 못봐서 Probation당할까봐 또 다시 조마조마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일이 해결되지 않으니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무색해질 정도로 시간을 말 그대로 ‘허비’했다. 그도 그럴것이 나와 13년을 넘게 함께했던 나의 사랑하는 딸기 (반려견)가 아퍼서 병원에서 병간호 하다가 미국가기 단 하루전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항상 죽음이 주는 의미가 그렇듯이, 당시에도 정말 생각이 많아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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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와서는 또 부랴부랴 학과에 적응한답시고 눈코 뜰새없이 바뻤다. 프로젝트고 숙제고 미드텀이고 모든게 연기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한 학기가 늦춰진 상황에서 더 이상의 지체는 크나큰 리스크였다. 때문에 정말로 부랴부랴 공부를 시작했고, 프로젝트도 세 개나 있었는데 하나는 혼자, 두개는 팀플을 진행하면서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뻤었다. 이 와중에, 팀플을 하던 모 대만 학생은 하는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나한테 커리어에 대해 물어봤다. 사실 이게 상당히 짜증났다. 두시간을 만나면 한시간은 계속해서 커리어 얘기만 하고 있으니, 아 이게 뭐하는 짓인가 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 와중에 구직을 시작했다. 뭔가 비자에 데인게 너무나도 커서일까, 신분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타트업은 정말로 리스크가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열 군데 이상 면접을 진행했다. 하지만 긴장감은 채 한달도 되지 않아서 풀렸다. 헤이해진 것 보다는 학교 기말고사와 프로젝트 마감때문에 워낙 바쁜 나머지 면접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 전에는 그래도 하루에 열문제 이상 풀고 공부했지만, 약 한달여 간은 학교에 집중해서 어찌되었던간에 졸업 가능한 성적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들었던 수업중에서 그나마 인상 깊었던 것은 Computer Design 수업의 프로젝트로 Twitter Stream API를 사용해서 검색 결과를 실시간으로 bar chart와 map에 뿌려주는 것을 만들었다. 사실 위에서 설명했던 예전 자료구조 시간에 만들었던 것과 별반 다른게 없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대충 만들다 보니 이정도밖에 만들지 못했다.

졸업기준 패스와 옐로우스톤 여행: Mid 2017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고, 바로 솔트레이크시티 행 비행기를 끊어서 옐로스톤 국립공원으로 여행을 갔다. 그냥 떠나고 싶었다. 미국에서의 모든 것이 새롭지만 힘든 경험이었다. 글쎄, 지금은 많은 부분이 적응이 됬지만 당시에는 2017년 초반의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졸업을 못할까바 두려운 것도 있었고, 미국에 다시 오지 못할까봐 조마조마 했던 것들 모두가 말이다.

그런데 다행히 옐로스톤에서 졸업기준을 패스했다는 얘기를 들었고, 졸업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친구들도 운좋게 금방 구했다.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게 졸작을 진행할 수 있었고, 옐로스톤을 다녀와서는 반년만에 다시 유라임 개발에 복귀를 했다. 솔직히 2017년 상반기 내내 개발을 한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사건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항상 그렇듯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손놓고 그저 술과 놀거리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유라임 개발 집중: Mid 2017

드디어 이 이야기까지 왔다. 결국 올해 6월부터 지금까지 유라임 개발에만 집중했다. 하루 평균 6시간 이상 개발을 했고, 많은 부분이 바뀌고 또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일전에 ReactJS로 Migration하려던 것도 다시 리엑트를 공부해서 바꾸는데 3개월 정도 걸렸고, 중간에 3주 정도는 한국에 다녀왔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대로 열심히 개발을 했다.

결론

이로써 정말 내 블로그에서 가장 긴 글을 작성했다. 사실 총체적으로 나 자신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었다. 글쎄, 이 글을 누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내 실패가 부끄럽지는 않다. 정말 돌이켜보면 많은 실패를 했다. 사업실패, GRE, 대학원 apply, 영어성적, 비자 등등 말이다. 그럴 때마다 정말 최대 3개월 정도 나는 방황을 했던 것 같다. 여기서 방황이란, 술이나 마시며 현실을 회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뭐 때론 그런것이 필요하겠지만, 냉정을 찾고 스스로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할 것이다.

머릿속에 항상 압박은 있다. 이것 해야지 저것 해야지 등등. 따지고 보면 내가 가장 안한것이 공부이다. 매번 공부는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하지 못했다. 사실 뭐 방법을 모르는 것도 있지만, 일단 시작을 하지 않으니 그것도 문제일 것이다.

앞으로는 개발도 개발이지만 자기개발에 꾸준하고 싶다. 그리고 블로깅을 통해 지속적으로 마음을 잡아나가고 싶다. 물론 나는 매일 일기도 쓰고 컴퓨터에 다른 글도 많이 쓰지만, 더 배움을 가지고 싶다. 이제 말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갈 수 있도록, 스스로 인생 전반을 쭉 훑어봤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관심분야가 결국 쭉 보인다. 공부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혼자서 프로젝트 진행이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행해 왔으니 이제는 사회로 가야할 차례인 것 같다.

그래, 결국 사회를 잠시 떠나온 5년이란 시간동안 참으로 방황이 많았다. 이제는 정말, 내가 하고싶은 것을 키울 수 있는 그것을 더 찾아보도록 하겠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나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이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