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그리고 공헌.

 2014년 들어 몇일 째 계속되는 GRE공부에 오늘은 정말이지 많이 지쳐서 심한 멘붕과 함께 해탈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사실 GRE라는게 지금까지 계속 단어만 외웟는데, 단어도 잘 안외워지고 외워야 할 단어도 많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를 보긴 했는데 “한글”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아서 생각이 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어휘라는 것이 정말 그사람의 교양의 정도를 알려준다는 것을 이번기회에 정말 절실히 느끼는 것 같다. 그간 내가 얼마나 책을 안읽었으면 심지어 한글의 뜻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겠는가, GRE어휘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국어를 기피해왔던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반성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오늘은 금요일이니깐,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휴식을 하면서 지난주부터 읽기 시작했던 “스티브 잡스” 를 보았다. 그의 일생을 읽어나가며, 내 머릿속에는 한가지 내가 아직도 결정을 바라고 있는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바로 “인생의 사명” 이다.

[#M_사명을 얻기 위한 인생의 고찰|접기|

 지금까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방향만을 쫓아갔다. 5살때부터 컴퓨터가 좋았고, 10살때부터 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약 20년간을 거의 한결같이 웹과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정말이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봤을 때 나는 다시금 어린시절의 나로 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나의 주된 취미는 웹사이트 레이아웃 설계. 지금 생각하면 참 그당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취미를 가졌을까 라는 생각도 있지만, 웹을 구상하는 자체가 내겐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Frameset으로 웹을 구상하고, 웹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PHP와 MySQL을 통해 게시판과 회원관리 등을 만드는 것도 재미삼았었다.

 디자인에도 관심이 많았다. JASC의 페인트 샵 프로부터 포토샵, 일러스트까지. 당시 유행하던 아쿠아버튼이라던가, 그런 여러가지 튜토리얼들을 따라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작품(?)이 많지 않은게 사뭇 아쉽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웹을 제작하는 “방식”을 따라갔다. 서울로 이사오고 나서는 지하철에서 영진출판사의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라는 책을 읽고있었다. 2002년, 그리고 나는 일전에 내가 하던 레이아웃 기획이라는 것이 스스로 웹기획이라는게 내게 맞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서울로 이사오고 나서 나는 정보올림피아드를 준비하며 C언어를 접하고 알고리즘을 접하게 된다. 고3을 지나며 무엇보다도 “수학”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지게 된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어정쩡한 관심이었지만, C언어를 접한 것 만큼은 스스로 후회하지 않는다. 무려 4년이라는 시간동안 정올에 나오는 문제들을 풀며, 사실 알고리즘보다도 C언어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으니깐.

 고등학교때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신기했다. 디자이너 친구가 만들어준 캐릭터를 가지고 Win32 API를 통해 Direct X API로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누구에게나 정석이겠지만, “윈도우즈 API 정복” 이라는 책이 내게 가져다준 흥미 또한 잊을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웹을 단순히 취미로만 다시금 여기고 게임을 만들었다. 끈기가 부족해서인지 완성된 게임이 하나도 없지만 친구를 통해 당시 C++의 Class를 접하며, “객체”에 대한 인식은 내게 큰 경험 중 하나였다.

 고3때는 대학진학으로 프로그래밍을 잠시 접다시피 하였지만, 뜻있는 친구들과 함께 20살이 되면 게임을 만들고자 했고, 수능이 끝나고 그들과 함께 나는 IT연구소를 만들고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리더로서 나의 자질은 부족했고, 나는 말하는 것에 약했다. 그저 나는 내가 좋아하던 것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20살때 제대로된 게임 하나 만들지 못하고 소중한 20살을 보냈다.

 그리고 20살 후반, 지금도 나와 가장 친한친구로 남아있는 L군의 추진력으로 God Game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다시 뭉쳤다. 이과정에서 친구 하나는 아쉽게도 이탈했지만, 나머지 세명은 계속해서 팀을 꾸려나갔다. 나는 이를 통해 투자를 받았고, 1년 뒤 무려 25명이나 되는 게임개발 팀을 꾸렸다. 본래 프로젝트 매니저가 하고싶던 나는 PM이라는 직함으로서 그래픽, 프로그래밍, 기획 팀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방탕했다. 거의 매일같이 술을 먹었고 마치 내가 무슨 사회에서 대단히 성공한 사장님인 마냥 행세했다. 실제로 팀을 잘 조율하지도 못했고, 리더쉽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술만 먹고, 직원들과 노는것만 좋아했다. 대표적인 예로 점심시간만 되면 모두가 한시간 가량 게임을 했다. 게임회사에서 왜 게임을 하지 못하게 하는지,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알것만 같다.

 결국 1년만에 나는 PM에서 물러나고 HR부서를 혼자 담당하게 된다. 인사, 총무, 회계 등의 업무를 맏고 대표를 위임한다. 물론 이과정에서도 HR에 큰 노하우가 있는 당시 대표님께 HR및 회계 관련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실제로 회사가 돌아가는 과정에 대해 많은 교육을 받았다. (일전에는 모회사가 있었고, 모회사에서 회계 등을 담당해줬다.)

 하지만 게임개발은 순탄치않았고, 잦은 팀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2008년 8월 게임개발 프로젝트는 종료된다. 당시 22살이었던 나는 직원들과의 마지막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오는 택시안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겨우 22살인데 나는 내 인생이 망한 것 마냥 스스로를 비탄했다. 

 크나큰 낙심속에서 가족들과도 불화가 생겨 집에서 나갔고, 월 35만원짜리 무보증 고시원에서 나는 나 스스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술에 빠져서 지내긴 했지만, 아직 인생의 22% 밖에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금 개발자로서 나를 돌이켜보게 된다. 다행히 사업을 하면서 간간히 아버지 회사의 자바 빈즈 기반의 JSP인트라넷을 담당하고, 대학 후배들과 친구들의 Java프로젝트를 도와준 경험을 발판삼아서(특히 네트워크 프로그래밍) 자바와 함께 닷넷을 공부했다. 그러던 찰나 나는 친구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매쉬업 경진대회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이 과정에서 정말 내 인생에 중요한 동반자인 Cloie를 당시 기획자로서 만나게 된다.

 사실 병특을 가고자하는 의욕은 있었지만 사업실패의 충격은 상당히 컸다. 부모님의 도움으로 빛만 떠넘겨받지 않았을 뿐이지, 심리적으로는 크나큰 빛을 지고 사는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좌절, 또 좌절했다. 그 좌절 중 하나는 2008년에 나는 사실 당시 게임회사 대표님이 직원들을 모두 권고사직 하고 새롭게 팀을 꾸려서 게임개발을 시작했는데(새로운 PM과 함께) 나는 거기서 병특 자리를 구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Part-time으로 HR부서로 남아서 일하기를 권하셨다. 이 과정에서 내 월급이 절반이나 삭감됬는데, 당시 카드를 신나게 쓰던 내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뭐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좌절은 이뤄 말할 것도 없고, 틀어진 부모님과의 관계 회복도 내겐 좌절 중 하나였다.

 그런 좌절을 극복할 수 있도록, Cloie는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Open API와 MS의 닷넷 기술을 이용해 단어암기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다시금 웹 개발자로 복귀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병특을 구직중이던 내게도 정말 운좋게도 개발직의 자리가 하나 생기게 되어서 2009년 3월 나는 수습 포함 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웹개발자로서, 병특으로 보내게 된다.

 당시 회사는 일종의 인력알선업체. 수주받은 프로젝트를 프리랜서들을 사용해서 완수하고, 이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는 회사였다. 사실 게임사업을 할 때는 몰랐지만 우리나라 IT업계의 갑을병정 관계는 정말 심했었다. 나는 그런 심한 관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프리랜서들이 개발하고 간 작품을 나는 하나 둘 유지보수했다. 1년이 지나고 나서는 내가 유지보수하고있는 사이트가 무려 10여개가 되었고, 대부분이 기술이 제각기 달라서 PHP ASP JSP는 물론 .NET기술까지 연마하게 되었다. 물론 기술을 아는데에는 깊은 지식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2009년은 무엇보다도 .NET vs Java에 대한 갈등이 가장 컸다. 결국 나는 내가 유지보수하고있던 사이트 중 .NET사이트는 1.1이었고, 자바는 무려 Spring 2.0을 사용하던 사이트였기 때문에 템플릿 엔진과 Hibernate등을 사용하던 스프링 프로젝트에 더 관심이 갔고, 결국 나는 자바개발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2010년, 훈련소에 입소하고 그곳에서 나와 같은 병특들을 보았고, 우물안의 개구리었던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명문대 출신의 여러 친구들이 N모사 같은 유명 게임회사의 병특으로 일하고 있었고, 그들의 대우는 정직원 이상의 대우였다. 헌데 나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그들에 비하면 연봉도 1/3정도, 하는일은 못해도 두배는 많은 것 같은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참기 힘들었던 것은 일반직원들과 차별대우였는데, 당시 회사에서는 나를 “장일병” 이라는 별명을 달았고, 개발은 기본에 컴퓨터 수리까지 내게 도맡게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나에 대한 처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처신을 잘못한 것이 더 큰 원인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생각이 짧았고 어렸다.

 그래서 나는 전직을 갈망했고, 회사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잡일을 많이 처리하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회사에서는 나를 쉽게 놔주려 하지 않았다. 옮기려는 회사는 이미 친구를 통해 잡아놓았지만 회사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병무청을 통해 “비동의 전직” 과정을 밟았고, 인생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2010년 8월, 결국 나는 전직에 성공했다. 나의 송별회때 나를 자주 괴롭히던 대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중소기업은 패배자의 집단이다.” 당시에는 그게 참 맞다고 생각했는데, 20년간 멋있게 중소기업을 꾸리고 직원들을 가족같이 생각하고 사랑해주시는 아버지를 보면 한편으론 잘못된 생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옮긴 회사는 여의도에 있는 금융권 IT회사. 내가 담당하는 업무는 JSP를 통해 각종 금융 업체들의 API를 URL을 통해 JSON으로 Client쪽에서 요청한 규격에 맞게 파싱해주는 일이었다. 일종의 통신모듈이었고, 약 반년 정도 이를 담당하면서 한편으로는 Front단 업무를 진행하였다. 여기서 나는 직원 천 명의 대기업 문화를 옅보게 되었고, 당시 만난 사내의 고학력 병특들과 친해지면서 다시금 나의 눈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2011년부터는 팀을 옮기고 나는 비로서 웹을 담당하게 되었다. 익숙한 Windows + Apache + Tomcat 서버를 담당하고 다양한 금융권 사이트 제작에 참여하였다. 물론 100% 내가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보다 더 체계화되어 있는 금융권 SI 몇몇 곳에 투입되어서 모듈을 제작하면서 다양한 기술을 배웠다. 이과정에서 나는 취미로 하고있던 RIA기술을 보다 더 확대시켜서 Flex를 공부하고, Open API와 Google의 Open Social을 연동해 네이버 소셜앱을 만들었고, 그해에 있었던 네이버 소셜앱 경진대회에서 학생부 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이어서 나는 HTML5에 관심이 꽃혔다. 그리고 HTML5 Korea를 만들고, HTML5와 관련된 기술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한편, Spring 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러 오픈소스 프레임워크들을 알게되고, 한편으로는 2년만에 드디어 스스로 Spring 환경을 구축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형상관리에도 관심이 많아서 SVN에 대한 공부와 함께 Hudson Ants등을 통한 테스트/협업 환경을 구축하고 당시 단순히 클래스 등을 메일로만 주고받던 우리 팀에서 테스트 서버를 구축하고 SVN환경과 시스템 배포 등을 자동화 하는 등의 역할을 통해 개발 자동화를 구현하였다.

 2012년, 길고 긴 병특 기간이 끝나고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HTML5 관련 서적 집필 의뢰를 받고, 이에 대한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5년만의 학교 복학이었으므로 학과 생활에도 충실했다. 학점이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2학년을 무난히 마쳤다. 가장 큰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미서부로 떠나고 많은 여행중에서도 실리콘벨리에서 차를 랜트해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스티브잡스의 차고 등을 방문하면서 그간 마음속으로만 동경했던 곳에 실제로 가보고 느껴봤다. 그곳에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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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교환학생을 가고자 하는 생각에 방학을 토플과 함께 보냈다. 하지만 교환학생에 들어가는 비용이 대학원 유학비용과 흡사하다는 판단하에 마음을 미국 대학원 진학으로 돌렸다. 7월에 40일정도 유럽여행을 다녀왔고, 서적집필을 마무리하는 등 여러모로 바쁜 생활을 보냈지만 사실 2013년은 순탄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공부” 라는 것을 하려고 하다보니 너무 안되는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원서”를 읽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영어로 된 자료로 학습을 하려는 것을 시도하려다 보니 힘든 과정이 많았다.

 그렇게 2014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기나긴 20대를 보낸 것 같지만 실제로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연구방향” 은 사실 작년부터 고민하기 시작한것이나 마찬가지다. 영어공부를 본격적으로 했던 것도 작년이고 공부를 하려고 했던 것도 작년이다. 그 전의 나의 시간은 대부분 그저 내가 하고싶은데로 하고자 하는데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일 것인지, 가장 의미있는 행동일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동안 내가 아이젝트를 만들면서 해왔던 것이 무엇인가, 개인브랜드를 만든 자체는 모든것이 개인을 위해서이다. 나는 웹을 통해 개인의 삶을 진보하고 발전시키고 싶다. 웹을 만드는 것이 나는 가장 재미있고, 웹에서도 어떤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이 즐겁다. 그런 기술에는 Back단도, Front단도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특히 Back단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싶고, 작년부터 계속해서 “분산처리” 환경과 “기계학습”에 대해 보다 더 깊게 알고싶다. Data Mining을 통해 웹서비스 속의 사람들의 패턴을 분석하고, 이를 한 기업의 이윤이 아니라 한 개인의 이윤을 위해 사용하고 싶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고등학교때부터 끝없이 고민해왔던 “성공학”에 대해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삶에서 성공을 꿈꾼다. 그들의 성공이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증진시킬 것이 분명하다. 지금의 많은 웹서비스들이 인간 개개인의 성공을 도모하지만 나는 웹에서의 사람들간의 협업을 통해 그들이 삶을 보다 더 윤택하게 만들고 서로 도와가며 나아갈 수 있는 삶을 만들고자 한다.

 “개인”의 “성공(행복)”을 “웹서비스”로 “돕는다”. 

 개인의 personality를 강화하고, 그들의 goal/happiness을 web service로 돕고, 그들의 data 를 mining하고, 내가 설계한 distributed system에서 server learning(machine learning)을 통해 다시 개인의 goal/happiness 에 contribute한다. IT를 통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진정한 나의 사명이 아닐까, 보다 강력한 개인을 만들면, 조직도 강력해 질 것이고 나아가 인류 모두가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 나는 기술의 최전방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영어, 특히 GRE는 그 관문 중 거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최전방은 결국 IT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미국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며, 그렇게 내가 목표하는 미대학원을 가게 된다면 기술을 선도하는 석학들에게 나의 기술력과 나의 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게 될 것이고, 이후 여러 기업에서 내가 prototyping하는 서비스들이 나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참 이 인생의 사명 한줄을 얻기위해 나의 삶을 1000자 이상으로 끄집어내어 본다. 30대에는 기술력과 철학을 발전시켜서 인류의 성공을 돕고, 40대에는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고, 50대 이후부터는 미래를 내다보고 인류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스스로 간절히 희망한다. 

CMU MSSM 21' 재학중. AI기반 습관관리 서비스 유라임 (urhy.me) 대표. 전 금융권 소프트웨어/데이터 엔지니어. 대학원 생활, 실리콘벨리, 유라임 이야기를 주로 씁니다. 데이터과학과 시각화, 대용량 아키텍처,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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