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스스로를 잡기가 너무 힘든 것 같다. 항상 느끼지만, 내가 원하는 무언가가 성취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아닌 이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적어도 근 30년 이상 내가 원하던 삶이 만들어진 지금, 모든게 순조롭게 흘러갈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스스로는 더 관리가 안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폭발할 것 같은 머릿속의 생각을 표출하기 위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전번의 글을 통해서 self-discipline을 계속 지키고자 아침에 운동을 이틀 했지만 삼일을 채우기가 힘들었다. 비단 나의 의지력만이 문제였을까, 혼동 속에 내 답은 결국 술을 찾는 것이었을까.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안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만들기 위해서 무의식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스스로를 생각하고, 스스로를 볼 때마다 안타깝다. 명확히 말하면, 요즘에는 4-5시면 거의 업무를 종료하게 되는데 그쯤부터 잠들기 전인 8시 정도까지 그 세시간 남짓한 시간이 난 가장 힘든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것을 해도 10-20분이면 쉽게 질리게 되고, 심심하다는 생각 속에 찾는게 술이다. 아마도, 내 기억속에 가족을 제외하고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술자리인것만큼은 확실하다. 20대 이후, 나의 모든 힘들었던 삶 속에 술과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에 오면서도 난 술에 의존했다. 그게 점차 내 무의식속에 뿌리를 내려서 난 결국 알콜의존증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황이 모두 안정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작년에는 100일 금주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그 기회를 잡았고, 남부럽지 않은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적어도 개발자로써는 일차적인 성공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어쩌면 ‘대화’가 통하는 공간에서, 나는 Next step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이게 내가 바라는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간혹 들더라. 10여년 전에 내가 바라던 지금의 삶은 물론 지금의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었지만 나만의 사업체를 가지고 성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풀스택으로 디자인까지 잘한다고 사업이 성공했는가, 지금까지 내가 유라임을 위해서 투자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을 때, 나는 유라임을 통해 사업적 성공과 자기관리라는 두 가지를 바랬지만 집착이 만든 결과는 나를 그토록 신뢰하던 가족마저도 내가 폐인이 될 것을 경고하게 이른 것이다.
그래서 정말 빠르게 달려가기만 했던 스타트업에서 난 실패를 맛보았고, 어느정도 정해진 틀에 따라서 우회적인 루트로 10년전 내가 바라던 회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딱히 이런 정해진 틀이 쉬운것도 아니었다. 탑 대학원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 나를 뜯어고쳐야 했고,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기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달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결국 정상적인 루트로 돌아온 지금,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면 그건 그냥 적정한 안정의 상태의 유지, 즉 고요의 상태를 추구하고 싶다는 것이다.
심심하다는 것은 결국 나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그것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 스타트업에서는 정해진 기준치가 없어서 나 스스로를 엄청나게 높게 책정하였기 때문에 난 달릴 수 있었다. 물론 그 방향이 잘못되었지만. 하지만 회사는 기준치가 확실히 정해져 있다. 승진을 하기위한 조건들도 명확하다. 특히 내가 다니는 회사는 정말로 투명하다. 그래서 눈에 보인다. 내가 지금은 어느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업무 자체가 크게 어렵지 않고, 오히려 자주 도전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도전하면 기존의 틀을 깰까봐 그것도 조심스럽다. 그래서 대기업이란게 정형화된 틀을 깨기가 어렵다는 것 같다. 물론 여러 대화를 통해서 나도 발전적인 방향을 지속적으로 얘기하고 있고, 회사는 어떻게 보면 이 IT업계의 1,2위를 다투는, 끝없이 혁신이 만들어지는 공간이고. 나도 그런 혁신의 장치는 충분히 인지한다. 그래서 회사의 그런 혁신의 장치를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을 하다보면 결국 난 고요의 상태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즉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을 연신 느꼈다.
묵묵히 수행할 수 있는 상태. 마음에 모나지 않고, 굳이 흥을 추구하지 않아도 중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난 삶을 그렇게 만들고 싶다. Spontaneousness를 버리고 싶다. 그래서 선택한 이 절정의 안정적인 상황을 왜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루가 다르게 어긋나는 것일까. 아마도 나는 좀더 많이 겸손해야 하나보다. 아직도 60-70년은 더 살아가야 하는 내가 너무 건방지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이룬 것들이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 내가 말이다.
결국 나는 다시 스스로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잘못을 따져보면 누가 잘못된 것인가, 결국엔 나 자신, 나 스스로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아무리 과거에 술과 친구들을 즐겼고, 과거의 습관이 있어서 지금 내가 이렇게 술에 의존하고 흐트러진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결국 그건 다 핑계가 아니던가? 항상 잘 할 것이다, 잘 될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다시 흐트러진 나의 모습이 되는 것은 그 누가, 환경도 과거의 경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만든 것이다. 무한히 술을 마시고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몸과 시간적 자유가 허락되지만 누가 그것이 영원하다고 하였는가, 오늘은 괜찮다고 누가 그랬던가, 상황이 무의식적으로 술을 시키고 쇼파에 앉아서 티비나 끄적이는 것이 내겐 가장 편한 휴식이라고 누가 정의했는가. 그 모든 것의 원인은 현재의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선택하는 순간의 나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찰나의 나, 찰나의 순간, 정말 1초도 안되는 순간의 선택이 나를 안정적인, 고요의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흥을 추구하는 것, 모든것을 내려놓고 싶은 것들, 모두가 말이다. 이 머릿속의 고요의 상태를 위해서는 나도 방법을 잘 안다. 명상, 운동, 독서 등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있지만 이것을 선택하지 않는 나를 바꾸지 않고서는, 결국 내가 원하는 꾸준한 안정적인, 정진의 상태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약 세시간 정도 이 글을 쓰면서 난 나의 내면을 바라봤다. 사실 글쓰는 행동은 나와의 대화와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이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는 더더욱 그렇다. 단순히 일기를 쓸 때에 비해서 한번 더 정제된 글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한층 더 심오한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정말 머릿속의 지금의 복잡한 생각 (술먹고 싶고, 고요하고 싶고, 머신러닝 수학 공부하고 싶고, 앱만들고 싶고, 개발하고 싶고, 유튜브 찍고싶고, 작곡하고 싶고, 게임방송 보고싶고, 책보고 싶고, 소설 쓰고싶고 등 무수히 많다.) 을 정리하고 싶어서 온갖 것을 바라봤지만 결국 글쓰기로 귀속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마음은 편안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럽다. 마음이 편한하지만, 오늘의 4-8시는 견딜 수 있을까, 내일은 어떨까? 난 과연 술을 끊을 수 있을까, 모든 물음에서 난 근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고요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치 초등학교 때에 생활계획표를 짜둔 것처럼, 그 시간표상에서 움직일 수 밖에 없다. 그걸 하나하나 해내는 능력, 하지만 너무 미친듯 무리하지 않게, 그것이 나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킬 것이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고요의 상태를 가져올 것이다. 성공이란게 결국 별게 아니었다. 지금의 내가 자유로운가? 나는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의 과거의 잔재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기에 난 스스로를 깨쳐야 한다. 아직도 난 부족하다. 내가 고치지 않으면, 난 과거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할 것이다. 술, 특히나 알콜이란 자체는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가장 없애야 할 근원적인 존재이다.
진정한 자유, 고요속에서 무한한 지식을 탐닉할 수 있는 자유, 이를 위해서는 알콜을 없애며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만들어야 한다. 알콜과 흥을 즐김에 나는 자유롭다가 아니다. 되려 이런 안정적인 상황일수록 난 더 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몸은 노화가 되면서, 건강하지 않은 삶을 산다면 과연 오늘의 즐거움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몸은 더 가볍고 건강하게, 그리고 모든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스스로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지적 즐거움을 더 즐기기 위해서. 그게 아마도, 인생의 마지막까지 내가 추구할 길이 아닐까.
결국, 나는 흥의 정도를 조절해야 하는 훈련을 해야하고, 나 스스로를 뼈를 깎듯이 바꿔야 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지, 인생을 즐길 수 있다. 찰나의 선택의 순간, 그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내 수행이다. 그 순간의 나를 바라보며, 난 싸우겠다. 4-8시의 시간에 내게 찾아오는 무의식적 흥을 추구하려고 하는 나를 바라보며 No라고 단호하게 외치는 내게, 난 스스로 보상을 할 것이다. 사실 만약 내가 그렇게 No라고 한다면 여태까지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적어도 안정적인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루를 버티면 몸이 더 건강해 질 것이고, 공부하는게 많아질 것이고, 시간을 벌 것이다. 그래서 그건 정말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가져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No가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때마다 한번 나는 내게 25센트씩 줘보겠다. 얼마나 많은 25센트가 쌓여야지, 내 마음의 자유가 일어날 수 있을지.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그것을, 난 해보려고 한다. 그게 어쩌면, 앞으로 내가 수행해야 할 가장 큰 덕목이 아닐까. 그렇게 다시금 나는, 고요함과 그저 끝없이 지적인 욕구를 원하는 스스로를 수행해 나갈 것이다.